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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메이지무라편 계속 이어집니다.

 

 

 

 

 

29. 1월 28일 - 일본의 근대화과정을 보존한 박물관 메이지무라[博物館明治村](中)

 

   히가시야마나시군 청사는 2층까지 들어갈 수 있게 되어 있는데 2층에는 휴게실이 있고 난방이 가동되고 있었다. 배낭은 숙박하는 호텔에 놓고 왔지만 갑자기 많이 걸어서 약간 힘들었다. 이곳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후에 다시 렝가도리[レンガ通り]로 내려갔다.

 

 

   히가시야마니시군 청사 바로 오른쪽에는 시미즈의원이 있다. 1897년에 만들어진 원래 나가노현[長野県] 키소군[木曽郡]에 있던 건물이다. 이 의원의 의사였던 시미지반지로[清水半次郎]는 도쿄에서 학교를 졸업한 후 키소군으로 돌아왔다. 지붕과 벽은 흙을 이용하여 만들었지만 입구와 창은 서양식의 디지인을 본떠서 만들었다. 창문도 올라가거나 밖으로 열리는 게 아니라 안으로 열리게 설계되어 있다.

 

 

   주조공장, 은행, 그리고 전화교환국을 지나면 콘크리트 안에 보존된 차량이 있다. 옆으로 보아서는 오래된 차량인데 어떤 차량인지는 구별하기가 쉽지 않다. 객차처럼 보이는데 동차였다. 그것도 디젤이나 전기가 아닌 증기기관을 이용하는 증기동차인 키하6401이다. 증기동차 키하6401은 1912년 오사카의 기샤세조[汽車製造]에서 만들어졌다. 이 차량은 동차이므로 1량에 운전실과 객실 그리고 기관실이 모두 있다. 이용객이 적은 단거리 노선에서 운행하였다. 이런 증기동차는 기샤세조의 기사였던 쿠도병 지로[工藤兵次郎]가 소형 증기기관차를 참고하여 설계를 단순하게 하여 성능은 높지 않지만 신뢰성과 취급을 간단하게 만들어서 1909년 개발하였다. 이 차량의 특징은 증기기관부를 용이하게 차량본체로부터 떼어낼 수 있어서 기관부의 보수 점검을 하기가 쉽고, 또 후부 운전실에 있어도 증기의 개폐를 할 수 있는 점에 있다.

 

 

   내부도 들어가서 볼 수 있는데 꽤 익숙한 녹색이 롱시트였다. 증기기관이 커서인지 객차는 길이가 짧아보였다. 이 차량은 석탄을 연료로 사용하였기 때문에 기관사 이외에도 기관조수가 같이 타서 계속 연료를 넣어주어야 한다. 또한 반대 방향으로 운행할 때에는 기관사가 와이어를 통하여 뒤에 있는 기관조사에서 지시를 내렸다고 한다. 당시에는 원격으로 제어할 수 있는 기술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것으로 니쵸메는 끝나고 철길 앞에서부터는 산쵸메[三丁目]이다. 철길에는 위로 전차선까지 있는데 여기에는 실제 전차가 운행되고 있다. 교토시내 전차[京都市電]이다. 1895년에 개통되어 운행된 일본에서 최초의 시내전차이다. 다른 도시보다 교토에서 전차가 빨리 도입된 이유는 바로 교토 옆에 있는 비와호[琵琶湖] 때문이다. 비와호로 흐르는 강을 이용한 발전을 통하여 전력 확보에 유리하였다.

 

   개통 후에는 급히 ‘전기 철도 단속 규칙[電気鉄道取締規則]’이 만들어졌지만 전차 앞에는 고지인(告知人)이라는 안전운행을 위해 전차의 앞을 살펴보는 사람이 등장하였다. 고지인은 부로 12~15세의 소년으로 전차가 지나갈 곳에 사람이 있으면 먼저 뛰어가서 철로에서 벗어나게 하는 임무를 맡았다. 야간에는 등불을 들고 뛰어다녔으므로 매우 위험하여 1904년에 폐지되었다. 전차는 노선이 계속 확대되었고 1912년에 시에서 운영하게 되었으며 1978년 지하철 개통을 앞두고 모두 폐지되었다. 현재 메이지무라에서 운행되는 차량은 1910년에서 1911년에 만들어진 대형 차량이다. 현재의 전차와는 달리 운전석이 밖에 노출되어 있고 서서 있어야 하므로 날씨가 좋지 않을 때에는 매우 불편하고 운전사의 체력 소모가 많을 걸로 여겨진다.

 

 

   철길을 오른쪽에 끼고 언덕을 올라가면 키타사토연구소[北里研究所]가 있다. 연구소의 여러 건물 중에서 의학관(医学館)이 보존되어 있다. 팔각첨탑이 지붕 위에 있는 목조 2층 건물로 일본에서 파상풍균(破傷風菌, Clostridium tenani)을 발견한 세균학의 대가였던 키타사토 시바사부로[北里柴三郎]가 1915년 도쿄에 만든 연구소의 본관이다. 일본의 의학에서 세계적인 학자들은 미생물 연구를 한 사람들이 많다. 새로 나온 1,000엔 지폐의 주인공인 노구치 히데요[野口英世] 역시 세균학자이다. 과거 미생물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를 알아낼 수 있는 기술이 없었으나 17세기 말 현미경이 개발되고 나서 확인할 수 있었고 연구도 계속 진행되어 질병의 원인 중의 하나인 병원성미생물과의 연관성이 밝혀지게 되었다.

 

 

   안에는 당시에 실험에 사용되었던 기구들이 전시되어 있다. 현미경, 비이커, 배양조 등이 있는데 특이한 것은 실험 노트도 있었다. 키타사토 시바사부로의 제자였던 시가 키오시[志賀潔]가 썼던 노트이다. 노구치 히데요과 같이 이곳 키타사토연구소에 있었다. 노트에는 어두워서 자세히 볼 수는 없었지만 일본어와 영어로 자세히 실험에서 일어난 일들이 적혀 있었다. 당시에 다른 것들보다도 눈에 띄었다. 황우석 논문 조작 사건의 폭풍이 가라앉고 있던 시기였지만 여전히 언론에서는 이와 관련된 보도가 나오고 있었다. 약 3개월 전(2005년 12월)에는 서울대 진상규명위원회가 만들어져서 황우석 씨 실험실을 조사하였으나 컴퓨터나 노트에는 거의 기록이 없었다고 한다. 실험에서는 실험자의 철저한 계획과 준비 그리고 결과 등이 모두 노트에 기록되어 있어야 나중에 그걸 바탕으로 논문을 쓴다든지 이후 실험에 활용할 수 있지만 당시 황우석 씨 실험실에는 전혀 그런 게 없이 사람의 기억에 의존하였다. 그러다 보면 의도하지 않은 실수가 나올 수도 있고 기술 전수에서 문제가 있을 수 있다. 일본의 경우 지금의 선진국으로까지 올라간 이유에는 일본인의 성실함과 기록을 통한 발전이 크게 기여하였음을 부정하기 어렵다. 그와 관계없이 황우석 씨의 경우에는 논문 조작이라는 큰 잘못을 하였기 때문에 학자로서의 양심을 버렸으므로 더 이상 변명의 여지가 없다.

 

 

   연구소를 나와서 전차 선로를 따라서 가면 별장이 있고 호수가 보이는 곳에는 시나가와등대[品川灯台]가 있다. 프랑스인 기사인 베르니가 설계하여 1870년에 완성되어 점등되었다. 석유를 이용하여 불을 밝혔으며 광원의 높이는 지상 5.8m로 최고 18km까지 비추었다고 한다. 시나가와등대는 1858년 서양의 5개국과 통상조약을 맺으면서 각지의 항구를 개항하게 되고 외국선박에게 항로를 알려주기 위하여 만들어졌다.

 

   호수를 따라 가면 외국인 거류지에 있던 집들이 있다. 개항하면서 외국인들도 일본에 많이 들어오면서 이들이 살았던 집이다. 집들이 원래 있던 장소는 나가사키[長崎]와 코베[神戸]였다. 더 내려가니 마차가 있었다.

 

 

   승합마차[乘合馬車]이다. 말이 승객이 탄 차를 끌고 가는 형식이다. 여기에 있는 마차는 궁내청[宮内庁]에서 의식에 사용되는 것과 같은 형이다. 우리나라 드라마에서도 일제 시대를 배경으로 할 때에는 가끔씩 등장한다. 말 두 필에 조정하는 기수까지 있어서인지 메이지무라에 있는 탈 것 중에서는 가장 비싸다. 500엔으로 주변만 두 바퀴 돌고 일일권으로도 탈 수 없다. 날씨가 추워 입관객이 적어서인지 타는 사람의 모습은 볼 수 없었다.

 

 

   여기서부터는 욘초메[四丁目]이다. 욘초메가 가장 규모가 커서 17개의 건축물이 있다. 마차 타는 곳 뒤로는 철교와 증기기관차가 있었다. 로쿠고가와철교[六郷川鉄橋]에 위에 있는 증기기관차는 비사이철도[尾西鉄道]의 차량이었다. 로쿠고가와철교가 원래 있던 장소는 도쿄도[東京都]와 카나가와현[神奈川県]를 경계짓는 로쿠고가와[六郷川]이다. 이 철교는 1877년에 만들어졌는데 일본 최초의 복선용 철교이다. 1875년 영국에서 만들어져서 수입되었다. 1912년에는 토카이도본선 복복선에 따라서 단선용으로 개조되었고 1967년까지 사용되었다.

 

 

   철교 위에 있는 증기기관차는 비사이철도에서 사용되었다. 비사이철도는 토카이도본선과는 전혀 관계없이 나고야 서쪽에 있는 현재의 메이테츠 비사이선[尾西線]의 전신이다. 비사이선은 야토미역[弥富駅]과 타마노이역[玉ノ井駅]을 연결하는 철도이다. 이 여행기 다음에 연재되는 ‘일본 추석 여행기’에서 나올 예정이다. 전시된 증기기관차는 비사이철도가 개통된 1897년에 미국의 브룩사(Brook Locomotive Works)에서 제조되었으며 형식은 2B1으로 전축이 2축이고 동축이 2축, 그리고 종축이 1축으로 된 탱크식이다. 크기가 작아서 객차를 많이 끌지는 못했을 듯 하다. 그래서인지 비사이선이 전철화되고 나서는 신에츠본선[信越本線]에서 스위치백이 있는 니혼기역[二本木]역으로 옮겨져서 공장입환기로 사용되었다. 그러고 보니 니혼기역도 다음의 여행기에서 소개되는 부분이다. 이 여행기도 언제 끝날지 모르는 상태인데 본의 아니게 다음 여행기 광고가 되어 버렸다.

 

   이제 호수에서 다시 멀어져서 서쪽으로 향하였다. 생각보다 메이지무라를 구경하는데에는 시간이 많이 걸렸다. 해는 서쪽을 향하여 가고 있었다. 우지야마다우체국[宇治山田郵便局]과 유리제작소[硝子製造所]를 보았다. 특히 우지야마다우체국에서는 10년 후에 우편물이 도착하도록 하는 예약서비스를 한다. 한 번 해 보고 싶었지만 10년 후에는 내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지 예상할 수 없기에 둘러보고 나왔다.

 

 

   철도료신바시공장(鉄道寮新橋工場) 기계관(機械館)이 나왔다. 철도에서 가장 중요한 차량 중의 하나인 기관차를 수리하는 역할을 하였다. 외부의 철판을 포함하여 모든 재료를 영구에서 수입하여 영국 기술자의 지도하에 건설되었다. 안에는 철도에 관계되는 기자재도 있으나 1893년에 제작된 링구방직기(リング精紡機)도 있다.

 

 

   여기서 북쪽으로 가면 피서 때 사용한 집과 극장이 있다. 극장 옆에는 약간 어울리지는 않지만 목욕탕인 한다아주마유[半田東湯]가 있다. 치타한토[知多半島]의 중간 정도에 위치한 한다[半田]에 있었는데 입구에는 탈의실이 있고 안쪽으로는 목욕탕이 있었다. 여기에는 현재 족탕이 있어서 잠시 쉬어갈 수 있게 해 놓았다. 겨울이라 이용객이 적어서인지 모두 여탕에서만 할 수 있었다. 요금은 100엔인데 직원이 없어서 자율적으로 돈을 내고 수건을 들고 족탕에 발을 담그면 된다. 나는 추운 밖을 많이 돌아다녀서 조금 몸이 덥히고 싶어 따뜻한 물에 발을 담그고 여기서 쉬어 갔다. 이걸로 욘초메는 끝난다.

 

 

   언덕 위에 있는 하얀 성당으로 향하였다. 메이지무라의 텔레비전 광고에도 등장하는 세인트자비르성당[聖ザビエル天主堂, St. Francis Xavier's Cathedral]이다. 이 성당은 근세 초기에 일본에 와서 크리스트교 전도에 노력한 세인트 프란시스코 자비엘(St. Francis Xavier)을 기념하기 위하여 과거 자비엘이 있었던 교토에 지어졌다. 프랑스 신부의 감독에 의하여 본국에서 주문한 설계 원안에 근거하여 일본인의 손으로 만들어졌다. 기본 구조는 벽돌과 목조를 같이 사용하여 외부 벽은 벽돌로 쌓고 내부의 기둥은 나무로 만들어서 내외의 벽을 회반죽으로 발라 놓았다. 정면 입구 위에는 직경 3.6m가 넘는 큰 창문을 붙이고 지붕의 가운에로 십자가를 걸어 놓을 수 있게 해 놓았다.

 

 

   성당 안은 화려하였지만 장식유리 덕분에 빛이 적게 들어와서 어둡고 그리고 추웠다. 오르간 음이 나오고 있었다. 안에는 신부만 나오면 바로 예배가 가능할 정도의 분위기였다. 나무 의자도 있는데 얼음이 되어 있으니 앉기에는 좀 무리가 있었다. 하지만 밖에는 성당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 일본인들이 많았다. 역시 메이지무라의 최고 인기 건물다웠다.

 

 

   언덕을 내려가면 카나자와감옥[金沢監獄正門]의 정문이 있다. 이상하게도 메이지무라의 입구인 제8고등학교의 정문과 이미지가 완전히 동일하였다. 감옥이라 그런지 정문의 양옆에 경비실이 있고 문이 높게 만들어졌다는 전체 형태는 차이가 있지만 사용한 벽돌의 색이나 문의 모양은 정말 같다. 그 고등학교 나오신 분들이 알면 우리학교를 감옥과 비교한다고 기분 나쁘겠지만 직관적으로 그런 생각이 났다.

 

 

   감옥이니 우리도 감옥에 갇힌 사진을 한 번 찍어 보았다. 지나가는 일본인들이 ‘캉고쿠’라는 표현을 하는게 들렸다. 조심해야 하는 표현이다. 우리나라인 한국은 일본어로는 ‘캉코쿠(かんこく)’이지만 감옥은 ‘캉고쿠(かんごく)’이다. 중간이 ‘고(ご)’냐 ‘코(こ)’냐에 따라서 의미가 완전히 달라진다. 잘못 발음하면 한국이 아니라 감옥에서 온 셈이 된다.

 


   물론 메이지무라에는 감옥 정문만 있는게 아니다. 여기를 들어가면 그 당시의 감방과 경찰 순시소 그리고 재판소까지 모두 옮겨놓았다. 메이지시대의 작은 법조 단지를 꾸며놓았다. 감옥 정문 뒤에는 조그마한 연못이 있어서 오리들이 있었다. 죄수들의 정서 순화를 위하여 메이지 시대때부터 그랬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다음으로는 메이지무라 마지막편인 '일본의 근대화과정을 보존한 박물관 메이지무라[博物館明治村](下)'가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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