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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영국 - 아일랜드의 아픔을 담고 있는 외벽 도시 데리(Derry)

 

   숙소에서는 무선인터넷을 무료로 사용할 수 있었고 속도도 매우 빨랐다. 다음 일정을 짜고 숙소를 예약하였다. 점심이 지나서 숙소에서 나와서 시내로 향하였다.

 

   데리(Derry, http://www.derryvisitor.com )를 살펴보기 전에 이 도시의 역사를 알아볼 필요가 있다. 데리는 6세기 중엽에 수도원이 생기면서 마을을 이루었지만 노르웨이인의 침략으로 파괴되었다. 12세기에 아일랜드 전체가 영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고 1609년에는 제임스 1세는 영국인과의 동화를 위하여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 개신교 신자들을 이주시키고 외부의 공격을 막기 위하여 튼튼한 장벽을 쌓았는데 현재 시내를 둘러싸고 있는 도시 외벽(City Walls)이다. 잉글랜드에서 이주한 사람들 중에는 런던에서 온 상인들이 많아서 도시 이름이 ‘런던데리(Londonderry)’로 바뀌었다.

 

   1921년 아일랜드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하였으나 데리는 신교 신자가 많아서 북아일랜드로 영국으로 그대로 남았고 주변 지역은 아일랜드공화국이 되었다. 세계 경제 공황이 일어나면서 북아일랜드는 브리튼섬보다는 심하게 타격을 입었으나 세계 2차 대전에는 미국이 참전하면서 영국의 최서단의 항구로서 미군이 들어오는 항구가 되면서 활력이 넘쳤다.

 

   전쟁은 끝나고 1960년대에 북아일랜드에서는 노골적으로 개신교와 천주교를 차별하는 정책을 펼치기 시작하였다. 특히 천주교 신자의 비율이 높은 데리는 북아일랜드에서 소외된 도시가 되었고 실업률이 높아지고 경제 상황은 급격히 나빠졌다. 생계를 유지하기 힘들어진 천주교 신자들은 거리로 나와서 인권(civil rights)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이에 맞서 북아일랜드 정부에서는 로열얼스터경찰단(Royal Ulster Constabulary)을 동원하여 진압하였다. 점점 시위는 격화되고 이에 대한 진압도 폭력적으로 바뀌었다. 또한 북아일랜드를 영국으로부터 독립하려는 IRA(Provisional Irish Republican Army)가 결성되었고 시내 안에 프리 데리(Free Derry)라고 하는 자치 구역을 만들었다. 이 지역에서 IRA를 해산시키기 위하여 영국군이 투입되었다.

 

   결국은 1972년 1월 30일 일요일 시위를 하던 무장을 하지 않은 시민이 영국군의 총격에 맞아서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였고 이를 블러디선데이(Bloody Sunday)라고 부르고 있다. IRA의 테러는 북아일랜드에서 브리튼섬으로 확장하여 발생하게 되었고 1990년대 초까지 해결의 실마리를 보이지 않고 계속하여 테러가 일어났다.

 

   유럽연합(EU)에 가입한 아일랜드공화국의 경제가 비약적으로 성장하고 서유럽에서 종교의 중요성이 약해졌다. 영국과 아일랜드공화국 정부가 북아일랜드 문제 해결을 위하여 굿프라이데이협정(Good Friday Agreement)을 맺었고 투표에서 과반수 이상의 찬성으로 1999년에 발효되었다. 이 협정에서는 북아일랜드의 많은 권한을 아일랜드공화국으로 넘기고 북아일랜드 주민들은 영국 국적과 아일랜드 국적을 동시에 인정하고 있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얼마든지 남쪽으로 갈 수 있는 셈이다.

 

   IRA의 활동은 점점 줄어들고 북아일랜드에는 평화가 찾아왔다. 2005년에 완전 무장 해제하였다. 아일랜드공화국과의 이동이 자유로워지면서 데리는 다시 지역의 중심으로 인구가 늘어나고 도시는 활기를 되찾고 관광객들이 방문하고 있다. 물론 과거의 어두운 흔적은 아직 상처는 치유되지 않았지만 이제는 관광지로 바뀌어서 많은 사람들에게 평등의 가치를 알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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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1412 : 1972년 1월 충돌 때 영국군의 발포에 희생된 사람들을 기리는 블러디선데이 추모비(Bloody Sunday Memorial).]

 

[사진 1413 : 프리 데리(Free Derry)에 들어왔음을 알리는 주택의 벽.]

 

[사진 1414, 1415 : 주택의 벽에는 당시 충돌 상황을 그린 그림이 있다.]

 

[사진 1416 : 가로등 기둥은 아일랜드공화국 국기 색으로 칠해 놓았다.] 


   숙소에서 나오니 비가 많이 내리고 있다. 우산을 쓰고 블러디선데이 추모비(Bloody Sunday Memorial)에 갔다. 가끔씩 지나가는 사람들이 추모비를 살펴보았다. 희생자 중에는 20세가 되지 않은 젊은이들도 많았다. 주변의 주택에는 벽에 당시의 상황을 보여주는 그림이 그려져 있다. 보기만 하여도 무섭고 암울한 느낌을 준다.

 

[사진 1417 : 블러디선데이(Bloody Sunday)를 비롯한 데리에서 있었던 충돌에 관한 자료를 전시하고 있는 프리데리박물관(The Museum of Free Derry).]

 

[그림 1418 : 프리데리박물관 팸플릿. 오른쪽의 주소에는 영국(UK)이 아니라 아일랜드(Ireland)라고 적혀있다.] 

 

   근처에 있는 프리데리박물관(The Museum of Free Derry, http://www.museumoffreederry.org )에 들어갔다. 직원이 어디에서 왔는지 물어보기에 대한민국에서 왔다고 하니 매우 반긴다. 그들은 우리나라에서 1980년대에 일어난 민주화 과정을 알고 있을까? 1980년 신군부가 저지른 광주에서의 대량 학살을 알고 있을까? 블러디선데이를 비롯하여 데리에서 일어난 시민들과 정부와의 충돌을 사진과 함께 잘 설명하여 놓았다. 앞에서 설명이 되었지만 근본적인 원인은 종교에 따른 차별이었지만 실제 촉발한 계기는 경제적인 어려움이 컸다.

 

[사진 1419 : 데리 버스터미널.]

 

[사진 1420 : 승강장에 있는 광고로 랩핑한 버스.] 

 

   외벽 안으로 들어가서 버스터미널로 향하였다. 내일은 보름 이상 있었던 영국을 떠나서 아일랜드로 넘어간다. 슬라이고(Sligo)로 가는 버스 시각을 확인하였다. 버스터미널에서는 북아일랜드 곳곳을 운행하는 버스도 있지만 아일랜드공화국으로 가는 버스도 있다.

 

[사진 1421 : 미국으로 향하는 배가 출발하였던 장소라는 표식.] 

 

   근처에 있는 포일강(River Foyle)으로 갔다. 강에는 현재 커다란 항구는 없지만 과거에 미국으로 떠났던 배들이 출발하였다는 표시가 남아 있다. 19세기에는 아일랜드 상황은 좋지 않아서 신대륙인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는 사람들이 많았다.

 

[사진 1422 : 포일강 건너서는 런던데리역(Londonderry Station)이 있고 NIR 클래스(Class) 3000 디젤동차가 유치되어 있다.]

 

[사진 1423 : 복층으로 된 포일강을 지나가는 다리.] 

 

   강을 건너는 다리가 있고 런던데리역(Londonderry Station)이 보인다. 역에는 NIR 클래스(Class) 3000 디젤동차 3량 편성이 있다.

 

[사진 1424 : 구내 선로는 대부분 사용하기 힘든 상태로 되어 있고 증기기관차 모형을 한 차량이 하나 있다.]

 

[사진 1425 : 과거에는 네 노선이 만나는 터미널역이었지만 지금은 포일밸리 철도박물관(Foyle Valley Railway Museum)으로 사용되고 있다.]

 

[사진 1426 : 철길은 포일강을 따라서 이어진다.] 

 

   강을 거슬러서 걸어가다 보면 특수 협궤 철길이 나타나고 지금은 움직이지 않을 것 같은 증기기관차가 하나 있다. 건물에는 포일밸리 철도박물관(Foyle Valley Railway Museum)이 있다. 현재는 유산 철도(Heritage Railway)로 관리되고 있지만 과거에는 네 노선이 만나는 터미널역이었다.

 

[사진 1427 : 천정이 유리로 되어 있어서 자연 채광이 가능한 데리 시내의 쇼핑몰 포일사이드(Foyle Side).]

 

[사진 1428 : 어린이들이 즐거워하는 게임 가게.] 

 

   비가 오는 밖을 계속 걸어 다녀서 힘들었다. 현대적인 쇼핑몰인 포일사이드(Foyle Side, http://www.foyleside.co.uk )에 들어갔다. 안에는 비가 들어오지 않고 난방이 가동되어 따뜻하다. 간단히 점심을 먹고 앉아서 쉬었다.

 

[사진 1429 : 외벽 곳곳에는 통로가 있어서 차량과 사람이 드나들 수 있다.]

 

[사진 1430 : 영화관인 밀레니엄 포럼(Millennium Forum).]

 

[사진 1431 : 외벽으로 올라가는 길.]

 

[사진 1432 : 외벽 위에 있는 대포.]

 

[사진 1433 : 아일랜드 자치에 반대하는 연합론자(unionist)의 집.]

 

[사진 1434 : 외벽 안에 있는 아일랜드 최초의 신교도 교회인 세인트컬럼 대성당(St Columb's Cathedral).]

 

[사진 1435 : 언덕 끝까지 주택가가 펼쳐져 있다.] 

 

   밖에 나오니 다행히 비가 그쳤다. 외벽(City Walls)으로 둘러싸인 도시이니 외벽 위로 향하였다. 외벽 위로는 산책로로 되어 있고 대포가 있다. 안쪽으로는 교회가 있지만 대부분은 상업 지구이고 밖에는 언덕 끝까지 주택이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흔한 높은 아파트는 없다. 데리 서쪽으로는 아일랜드공화국의 도니골(Donegal)이어서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국경 사무소가 멀리 보인다.

 

[사진 1436 : 데리 외곽에 있는 대형할인점 세인즈버리(Sainsbury).]

 

[사진 1437 : 1851년에 세워진 세인트유진대성당(St Eugene's Cathedral).] 

 

   내일 버스를 타면 영국과 아일랜드 사이의 국경을 지나게 되지만 걸어서 국경을 확인하여 보고 싶었다. 포일강을 따라서 1시간 가까이 걸어갔지만 국경이 어디인지도 이정표가 전혀 없었고 가지고 있던 지도에서 표시되어 있지 않아서 계속 가기에는 무리였다. 데리는 시내 중심은 크지 않았지만 주택가는 넓게 퍼져 있었고 외곽에는 대형 할인점이 많았다. 아일랜드공화국과 가깝고 당시에도 아일랜드공화국보다 북아일랜드의 물가가 저렴하여 아일랜드공화국의 번호판을 단 차량이 많았다.


   숙소로 돌아와서 영국에서의 마지막 밤을 보냈다.

 

 

 

 

 

   다음으로는 '영국, 아일랜드 - 시인 예이츠(Yeats)의 고향 슬라이고(Sligo)'가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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