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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웃 일본에는 현재 100개가 넘는 성이 있고 일본을 여행할 때에는 필수적으로 한 번쯤은 둘러보는 장소이기도 하다. 마츠모토성[松本城, 관련 글 보기], 나고야성[名古屋城, 관련 글 보기], 이누야마성[犬山城, 관련 글 보기], 이가우에노성[伊賀上野城, 관련 글 보기], 니죠성[二条城, 관련 글 보기], 오카야마성[岡山城, 관련 글 보기], 타카마츠성[高松城, 관련 글 보기], 마츠야마성[松山城, 관련 글 보기], 코쿠라성[小倉城, 관련 글 보기], 오비성[飫肥城, 관련 글 보기], 히코네성[彦根駅, 관련 글 보기]이 이미 본 블로그에서 소개되었고 가 보았지만 정리가 되지 않은 성이나 성터만 남은 경우도 제법 있다. 물론 성은 진주성이나 수원성처럼 우리나라에도 있고 중국이나 유럽 등의 다른 나라에서도 볼 수 있지만 일본의 성은 자체만의 특징이 있으므로 일본성은 일본만의 고유한 문화로 생각하였다.

 

   남창에서 버스를 타면서 서생을 거쳐서 가다보니 서생포왜성(西生浦倭城)이 있다는 이정표가 있었다. 왜(倭)는 우리나라에서 일본을 뜻하는 글자(한자 사전 보기)이므로 일본성이라는 의미인데 우리나라에 일본성이 있다는 뜻이 아닌가? 일본인이 우리나라에 들어온 건 역사적으로 임진왜란과 일제강점기가 있다. 일제강점기는 일본에서도 폐성이 되고 방치되던 시기이니 우리나라에 괜히 성을 쌓을 이유가 없다. 일본성은 쌓는데 수십년이 걸린 경우도 워낙 많아서 임진왜란은 성을 만들기에는 짧은 시간이라서 우리나라에는 있을 가능성이 낮다고 생각했다. 찾아보니 임진왜란뿐만 아니라 정유재란 시기까지 일본은 울산에서 순천까지 해안가를 따라서 20개가 넘는 성을 쌓았다. 이들 성들끼리는 봉화로 연락을 하였다고 한다.

 

   당시의 축성 과정에서는 일본 장수의 지휘 하에 조선 사람들이 노동을 하여서 만들어졌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나서는 일부는 조선 수군의 진지로 사용되었으나 나머지는 방치되었다. 어느 정도 형태가 남아있는 성은 일제강점기에는 사적으로 관리되기는 하였으나 1996년에 문화재 재평가가 이루어지면서 일본인의 지휘로 만들어졌다는 이유만으로 모두 강등되어서 문화재자료나 시도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교과서에서도 임진왜란 당시에 일본이 성을 쌓았다는 언급은 없었던 걸로 기억하고 문화유산 답사에 관한 책에도 잘 나와 있지 않다. 울산광역시나 울주군에서도 대표적인 관광지로 소개하고 있지 않으니 사실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면 알 수 없다. 그렇지만 울산시 행사에 초대된 일본인들은 다른 곳은 빠져도 이곳은 필수 코스이다. 서생포왜성과 연관된 쿠마모토시[熊本市]와 우호협력도시이기도 하다.

 

   서생포왜성을 가는 길은 어렵지 않다. 서생포왜성 버스정류장에서 내리면 된다. 이 정류장에는 715번(노선도 보기)과 405번(노선도 보기)이 정차한다. 부산에서 출발한다면 진하해수욕장에 관한 글(관련 글 보기)에서 언급하였듯이 월내에서 갈아타도 되고 해운대시외버스터미널에서 시외버스를 타고 진하에서 내려도 된다. 진하까지는 시내버스로 한 정류장이므로 진하에서 올라갈 수도 있다. 기차를 타고 남창역에서 내려서 시내버스를 타는 방법도 있다.

 

 

   성으로 들어가는 입구에서부터 무언가 다른 게 느껴진다. 마을에는 과거의 성벽이 그대로 남아 있어서 담장으로 그대로 쓰이고 있다.

 

 

   좁은 길을 따라서 걸어가면 동문(東門)이 있다. 현재는 문은 없고 도로가 그대로 지나간다. 풀이 많이 자라기는 하지만 성벽이 있어서 이곳에 외성이 있었다는 걸 보여주고 있다.

 

 

   골목은 좀 복잡하지만 이정표가 있어서 그래도 따라가면 된다. 산 정상까지 연결되는 긴 성벽이 보이면 작은 주차장과 함께 화장실과 안내소가 있다. 이곳에는 문화관광 해설사가 근무를 하고 있고 팸플릿이 비치되어 있다. 또한 서생포왜성의 전체적인 모습을 담은 안내판이 있다. 일본인들의 방문이 많은 장소라 이곳의 안내는 기본적으로 한글과 일본어로 되어 있고 영어는 보기가 어렵다. 문화재의 최하 등급이라고 할 수 있는 문화재자료인데 거의 국보 정도의 관리를 하고 있다. 문화재자료면 사람은 볼 수 없고 거의 방치 수준으로 있을 걸로 생각했는데.

 

 

   서생포왜성은 임진왜란이 일어난 다음 해인 1953년 5월부터 일본 장수 카토 키요마사[加藤清正]의 지휘하에 1년만에 쌓은 16세기 말의 일본식 평산성이다. 명선교가 있는 회야강에 항구를 끼고 해발 133m의 산정상에 내성(內城)을 쌓고 그 옆의 경사면에는 누각을 두었고 아래에는 외성(外城)을 쌓았다. 성 외곽부의 길이가 2.5km여서 우리나라에 있는 일본성 중에서는 가장 규모가 크고 또한 지금까지 잘 보존되어 있다.

 

   1594년부터 사명대사가 이곳에서 4차례에 걸쳐서 평화교섭을 하였으며 1598년에 명나라 마귀(麻貴) 장군의 도움으로 성을 빼앗았다. 임진왜란 이후부터 1895년까지 서생포왜성은 조선 수군의 서생포진성(西生浦鎭城)으로 사용되었다. 비록 일본에서 쌓은 성이지만 훨씬 견고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래에 있는 해수욕장이 있는 마을의 지명이 진하(鎭下)가 되었다.

 

   한편 일본으로 다시 돌아간 카토 키요마사는 서생포왜성의 축성 경험을 바탕으로 나고야성을 쌓았고 자신의 영지인 쿠마모토의 하천을 정비하여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땅을 늘리고 난공불락의 쿠마모토성[熊本城, http://www.manyou-kumamoto.jp/castle ]을 만들었다. 그런 관계로 서생포왜성은 쿠마모토성의 견본으로 여겨지고 있으며 쿠마모토성에는 임진왜란 때에 식량 및 식수 부족의 문제점을 개선하기 위하여 깊은 우물을 120개 파고 타타미[畳]는 식용이 가능한 고구마 줄기로 만들고 안에는 은행나무를 심어서 전시에는 은행을 먹고 버틸 수 있게 하였다.

 

 

   물론 카토 키요마사는 그냥 일본으로 돌아가지는 않았고 울산에서 많은 사람들을 잡아갔다. 임진왜란 이후에 조선에서는 납치된 사람들을 다시 돌아오게 하려고 일본과 협상을 하였으나 사대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돌아오지 않았다. 당시 조선은 사농공상이라는 계급의 서열화가 강해서 잡혀간 기술자들은 돌아가면 계급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도 없고 일본에 잡혀갔다는 이유로 수많은 고초를 겪지만 일본에서는 기술자여서 좋은 대접을 받았기 때문이다. 서생에서 잡혀간 사람들은 성을 니시오[西生]로 바꾸고 일본에서 살아갔다.

 

   그런 역사로 카토 키요마사는 쿠마모토에서는 도시의 근간을 만든 영웅으로 쿠마모토성 북쪽에 있는 카토신사[加藤神社, http://www.kato-jinja.or.jp ]에 모셔졌으나 진주에서는 패퇴하는 왜적을 보고 '쾌재라 청정이 나가네'라고 환호하는 말이 '쾌지나 칭칭나네'라는 민요로 바뀌었다.

 

 

 

   안내소에서부터는 걸어서만 갈 수 있다. 좁고 급경사인 길이 이어진다. 포장된 길이지만 얼마가지 않아서 비포장으로 바뀐다. 일본성에서와 마찬가지로 짧은 등산을 해야 올라갈 수 있다.

 

 

   돌로 쌓은 성벽 사이에 있는 내성 주출입구가 나온다. 비포장이었던 길은 출입구에서는 바닥이 돌로 되어 있다. 과거에는 여기에 나무로 된 건물이 있고 문이 있었다. 바로 들어가지 않고 길은 경사가 있는데 밖에서 안을 볼 수 없게하고 유사시에는 공격을 하기 쉽게하기 위함이다.

 

 

   성벽을 따라서 들어가면 우물과 함께 사당이 하나 있다. 누구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이 성을 빼앗는데 기여한 장수를 제사지내는 곳으로 여겨진다.

 

 

   내성 주출입구를 지나서 올라가면 삼면으로 뚫려 있는 평편한 돌출형 소곽이 나온다. 이곳에는 3개의 출입구가 배치되어 있어서 동시에 수비, 통제하며 자체적으로 독립해서 전투를 수행하는 기능을 지닌다.

 

 

   여기서부터는 꽤 높아서 삼면으로 전망이 매우 좋다. 북쪽으로는 가까이는 회야강이 멀리는 수많은 굴뚝이 있는 온산 공단이 보이고 동쪽으로는 진하가 내려다 보이며 남쪽으로는 산이 이어진다. 임진왜란 당시에는 진하 마을이 있던 장소는 바다였다고 하니 성에서 내려가면 바로 배를 탈 수 있었던 셈이다.

 

 

   돌출형 소곽에서 올라가면 내성 주출입구가 있다. 여기서부터는 거의 평지이지만 주변을 보면 돌로 높게 쌓았다. 지금이야 어렵지 않지만 당시에 어떻게 1년만에 이렇게 높게 잘 쌓았는지 대단하기만 하다. 그만큼 당시 조선 사람들이 노예로 잡혀서 일을 하지 않았을까? 서생진성으로 조선 시대에 사용할 때만 해도 나무로 지은 건물이 있었을 걸로 보이는데 현재는 건물은 없고 대신 나무가 많이 자라고 있으며 성벽을 이루는 돌만 남아있다. 가을이라서 낙엽이 떨어지지만 봄에는 벚꽃이 피어서 유명하다고 한다.

 

 

   문이 정면으로 있지 않고 옆으로 있는 엇물림형 출입구를 지나면 관리사무소 건물이 하나 있고 산정부 중심곽이 있다.

 

 

   중심곽 한쪽으로는 성벽이 아니라 바위로 계단을 만들어 놓아서 올라갈 수 있다. 평평한 땅에 가운데에는 울산광역시에서 설치한 지적삼각점이 있다. 일본성에서 가장 높은 천수각(天守閣, 텐슈카쿠)이 있던 위치지만 건물이 없으므로 천수대(天守台)라고 한다. 한쪽으로는 세월을 이기지 못하였는지 돌이 무너져 있다. 천수대로 올라가는 계단은 반대쪽으로도 있다. 현재는 나무가 많이 자라서 전망이 좋지 못하지만 성을 만들었던 시기에는 나무 대신 5층짜리 천수각이 있었으므로 서쪽을 제외하고는 전망이 매우 좋았다고 한다.

 

 

   내성 가장 안쪽으로는 출격용 소곽이 있다. 처음에 이 성을 쌓았을 때에는 병사들이 출격을 하던 장소였는데 정유재란 때에는 방어를 하기 위하여 이곳을 막았다. 여기에는 장수들이 마셨다는 우물이 있어서 장군수(將軍水)라고 불렀는데 현재는 우물은 흙과 돌로 메워져서 보이지 않고 대신에 커다란 나무가 세 그루 자라고 있다.

 

 

   출격용 소곽과 외부를 구분하는 성벽은 경사가 급하고 높고 성벽 위로는 걸어서 다닐 수 있을 정도로 두껍다.

 

 

   성벽 밖에는 최전박 소곽과 지형절개형 호가 있다고 하지만 숲이 무성하여 확인할 수 없다. 좁은 산길이 성 바깥으로 이어진다. 숲에서 나오면 배가 익어가는 과수원이 있다. 여기서는 나무에 가려서 성의 모습을 볼 수 없다. 과수원 이외에도 밭이 있기는 하지만 인적이 드물어서 그런지 길가에 노루가 서 있었다. 사진을 찍으려고 전원을 켜니 놀라서 바로 도망갔다.

 

 

   추워지면서 야생동물이 먹이 부족으로 산에서 내려오고 멧돼지도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다시 성으로 들어가서 내려왔다. 답사를 하는데 1시간 30분 정도 걸렸다. 한산한 편이었지만 간간히 사람들이 올라와서 성을 둘러보았다.

 

   복원이 되지 않고 성벽만 남아 있어서 일본에서 본 성과는 느낌이 다르기는 하지만 성벽의 경사와 돌을 쌓은 모양으로만 보아도 일본에서 본 성과 같다는 걸 실감할 수 있었다. 서생포왜성을 기반으로 하였다는 쿠마모토성도 천수각 등의 여러 건물은 현대에 와서 복원하였고 현재 일본에 있는 성 중에서는 처음 만들어졌을 때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성은 얼마되지 않는다.

 

   서생포왜성은 1963년 국가사적 54호로 지정되었다. 하지만 일본인의 지휘로 만들어졌다는 이유로 1996년에 이루어진 문화재 재평가에서는 사적에서 제외되고 왜성이라고 이름이 바뀌어서 서생포성에서 서생포왜성이 되었다. 대신에 1997년에 울산광역시 문화재자료 8호로 지정되어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울산광역시나 울주군에서는 이 성을 복원하려는 계획을 세우기도 하였으나 일부 시민들의 반대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그런 관계로 일본 자본의 유치까지 검토하기도 했었다. 그렇다고 방치하여 놓은 상황도 아니어서 관리하는 인원이 상주하고 있으며 이정표와 안내판까지 잘 갖추고 있다.

 

   재미있는 건 2002년부터는 등록문화재라는 게 새로 생겼다. 지정문화재가 아닌 문화재 중에서 보존과 관리가 필요하여 등록한 문화재인데 일제 강점기 이후이 근대 유물과 유적이 많다. 철도에도 등록문화재가 제법 있고 동해남부선에서는 송정역과 남창역 건물이 여기에 속한다. 물론 두 역 건물 모두 일제 강점기에 만들어졌다. 임진왜란 때에 일본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과 일제 강점기에 만들어진 건 어떻게 다르다고 보아야할까? 기차는 광복 이후에도 대한민국에서 계속 타서 역을 이용했다고 한다면 서생포왜성은 임진왜란 이후에 조선 수군이 주둔하면서 동해를 지켰다.

 

   서생포왜성을 보면서 우리나라에 일본성이 있다는 게 놀랍기도 하고 잘 복원한다면 일본 관광객들은 물론 우리나라 국민들에게도 역사에 대한 의식을 고취할 수 있고 색다른 볼거리를 제공한다는 측면에서는 긍정적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일본에 의하여 만들어졌다는 이유만으로 반대를 하므로 현실적으로는 아직 어렵다. 그나마 서생포왜성은 도시나 개발이 된 지역에 있는 게 아니라서 다행히 없어지지 않고 그나마 보존되고 있다. 역사의 아이러니 속에 있는 문화재라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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